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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finitely L***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가? 복수? 분노? 거창한 사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무른 살을 가르고 맥박에 따라 솟는 피에 녹아든 공포, 절망, 고통 따위면 족하고도 나았다. 짐승보단 사람 쪽이 좋았다. 머리가 영리할수록 제가 처한 상황을 상세히 받아들이는 법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속을 까뒤집고 보면 결국 다 같은 내장과 피가 흘렀고, 그리고, 모든 살육이 곧 온전히 살육 그 자체를 위한 행위였다는 뜻이다. 다를 것이 없었다. 늘 그렇듯 모든 것은 큰 의미 없이 곁을 스쳐 갔다.

 

 언제나 밤하늘만치 고요했고, 적막한 검은 허공에는 간혹 불꽃놀이가 터졌다. 눈이 멀게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온몸이 저릿해지고 나면 이내 사라진 것은 그 모양조차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곧 새로운 불꽃이 터질 것이고, 각별히 여기는 모양 따위는 없었으니. 어차피 다 똑같은 폭죽일 뿐이다. 비린내와 비명이 가득한 유희로 제 몫을 다 하는 일. 할 수 있고 즐거웠기에 행했다. 살해는 오롯이 목적이었다. 그랬었다.



 

 때문에 여상한 일이었다. 제 몫의 숨을 걸어두고 맞부딪치는 일 역시 일방적인 육살만큼이나 즐거웠기에, 살을 내어주고 마지막 숨결이 잦아들어 가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아슬한 상황에 내몰리는 것은 언제나 오르가슴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흥분을 안겨왔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눈앞을 가로지른 낙뢰 직후 살이 타는 냄새가 난다. 잠시간 멈췄던 숨이 터지자 입가로 바람 소리가 시끄럽게 새고, 타들어 가는 통증 사이로 주인이 명확한 자줏빛 피가 튀었다. 아파. 기분 좋아. 복잡한 목적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철장을 시끄럽게 들이박던 짐승이 드디어 열린 문으로 튀어나간 것뿐이지. 유용한 칼로 이용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ㅡ그럴 것 같았다.

 

 귓가를 파고든 낮은 목소리의 끝을 쫓듯 꼬리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휘둘렸다. 네게 나는 얼터레스의 칼인가? 아니면 나인가. 평소라면 갖지 않을 궁금증을 찰나 간 품었다. 타인의 인식 따위에 신경을 써 본 적도 없으면서, 내내 네 목숨을 노리겠다고 발을 동동 굴러놓고서 이제 와서 그랬다. 독 연기가 자욱한듯했다가 이내 산산이 흩어졌다. 상념은 희열에 휩쓸려 금세 다시 잊혀졌다. 팔에 무언가를 베는 느낌이 선명하게 닿았다. 이번에 튀어 오른 핏방울은 선홍색이었다. 뭘 보고 있지? 바싹 다가서 본 빛이 들지 않는 눈은 네 말대로 유다를 것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물러가는 짐승의 입가에 피와 살점이 고였다. 네 눈이 감겼다.

 

 무너지는 몸 위에서 조금 전의 숨처럼, 의식에 앞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 시간 풀숲을 기어 드디어 이빨을 박아넣은 지극히 표면의 만족감. 그리고. 혀끝에 번지는 것은 지독하게 익숙한 맛이었다. 달려오는 모습들이 보였다.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몸에 날카로운 수정이 틀어박히고, 그림자가 오갔다. 타버린 살에 흔적이 남았다. 야천에도 보랏빛 낙뢰의 잔상이 희미하게 남았으나 짐승은 보지 못했다.



 

 이후로도 불꽃의 연속이었다. 하늘은 잠잠할 새가 없었다. 검은 부분보다도 빛으로 갈라진 틈이 많았다. 심심할 새가 없어, 좋았다. 뼈가 으스러졌다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가벼운 상처 따위는 치료조차 하지 않아 군데군데 쓰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디선가 시선이 닿아왔다. 요란한 형황 안에서 출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신경 쓰여. 빛에 피로해진 눈에 자꾸만 쓸데없는 잔상이 얽혔다.

 

 결국 날을 휘두른 것은 저이니, 유독 쏟아지는 냉랭한 태도 사이에서 늘 그렇듯 태평하게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표면을 뒤덮은 흥분에 가려져 있던 것이 그제야 고개를 쳐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었다. 끝에 달한 눈빛을 마주하지 못한 것이. 그깟 것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분명한데도, 속이 뒤틀렸다. 잠잠해진 하늘에 어둑한 낙뢰가 거미줄처럼 얽혔다. 눈을 떴다. 멀찍이 떨어져 자리해 있곤 하던 모습은 더는 없었다. 대신 바닥에 시선 없는 핏자국이 남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재미가 없었다.

모조리, 전부 다. 




 

 스스로의 변덕은 흔한 일이었다. 더없이 흥미롭던 것도 잠시 후면 지겨워 내던졌다. 이내 다른 즐거움을 찾았다. 분명히 그런 익숙한 틀이었어야 했는데, 다음 것을 찾을 심산이 들지 않았다. 차게 식은 속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연유를 찾으려 흘러간 시간을 되짚었다. 지나간 일에 신경이 쏠리는 것은 낯설었다. 고대하던 순간이 지나갔는데도 원하는 것은 손에 없었다. 모로 누운 채 손을 앞으로 뻗었다. 물든 땅으로 뻗어진 손아귀가 허공을 쥐는 시늉을 했다. 이내 자세를 고쳐 누웠다. 짜증 나네. 날카로운 바람이 흘렀다. 사방에서 한층 더 불쾌한 기색들이 쏟아졌다. 알 바는 아니었다. 감은 눈꺼풀 아래 검은 장막 위로 보랏빛 낙뢰가 불꽃을 터뜨리며 사방에 튀었다. 다 같은 폭죽, 사이의 명백하게 다른 것. 왜? 왜, 다르지? 다시 보니 잔상뿐이었다.



 

 폭풍은 멈출 생각이 없었으며, 끝도 없이 거셌다. 딱히 폭풍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제멋대로 떠돌던 바람은 몰아치는 기류를 따라 섞여들어 지면을 할퀴었다. 의지 없이 흔들린 꼬리 끝이 바닥을 훑으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후에 제 존재의 근간마저도 부술 거센 바람을 막을 것은 없었다. 족쇄가 묶인 쇠말뚝이 뿌리째 뽑혀나갔다. 사그라지지 않는 강풍의 기세 덕분에,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맞은 듯 지긋지긋해진 장소에서 벗어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번거로이 근거를 들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벗어나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메말랐다가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하는 핏속의 죽음을 느꼈다. 갈라졌던 살이 되붙는 것은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틀림없이 마냥 즐거웠을 것들은 여전히 전부 어딘가 한구석이 모자란 듯 무료했다. 충분히 재미있을 일이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질리는 만큼이나 쉽게 즐거웠었는데.


 

 개인의 심사야 어찌 되든 엉킨 시간은 그럭저럭 제 자리를 찾아 흘렀다. 거대한 바람이 할퀴고 간 궤적에서는 결코 폭풍에 가세할 리 없을 것 같던 이들이 바람에 휘말렸다. 조금은 흥미가 동했다. 참견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거미줄을 벗어난 이후엔 제 몫의 족쇄를 찾아 도로 떠나갈 이들이었다. 하나 둘, 큰 감흥 없는 얼굴을 한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늘어나는 머릿수를 괜히 반복해 헤아리던 손가락이 문득 허공에 멈추었다. 옅은 탄내가 코끝을 스쳐 갔다. 저도 모르게 반갑게 돌아간 고개 앞에서 여전히 의중을 도통 알 수 없는 검은 눈을 마주했을 때, 무슨 짓을 해도 떨치지 않던 무료함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잔뜩 들뜬 마음을 숨길 생각 없이 갑작스러운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야말로 네 말로를 제대로 지켜볼 것이라고, 갓 죽음에서 돌아온 네게 다가가 또 한 번의 살해를 속삭였다. 습관적으로 네 주위를 도는 몸 뒤에서 늘어진 꼬리가 사냥감을 감았다. 꿈과 현실을 분간하기 위해 꼬집어 본 흔적이라도 되는 마냥 남은 흉터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바싹 들이댄 얼굴 사이에서 시선과 숨결이 함께 오갔다. 다시 양껏 즐길 준비가 되었다. 달라진 것이 없기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임에도,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들었다. 연신 날카로운 숨소리가 샜다.  코앞에 달했던 죽음조차도 즐거웠다. 명계에서 끌려 나와 빈 껍데기를 바라볼 네가 있었으니. 그렇게 즐거움은 명확한 사유를 알지 못한 채 제 마지막인 줄 알았던 순간까지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다시 한 번 눈을 뜨고 마주한 하늘은 마지막 기억처럼 흐리지 않았다. 조금씩 새던 숨소리는 이내 폭소가 되었다. 아무렇게나 떨어진 몸을 돌려 대자로 드러누웠다. 어깨 아래 자갈 따위가 배기는 것이 거슬리기는커녕 마냥 기분이 좋았다. 가뿐해진 몸을 튕기듯 일으키자 이번에는 속내를 읽기 어렵지 않은 새카만 시선이 맞닿아왔다. 흐르듯 다가간 몸이 지척이었다. 채 가라앉지 않은 웃음기가 배어 들숨 날숨마다 요란하게 식식대었다. 가벼운 장난 몇 마디 이후 돌아온 협박에 되려 웃으며 손을 당겨 제 목에 대었다. 탄 내가 풍겼다. 가볍게 짓눌린 목 아래 맥박이 귓가에서 뛰었다.




 

“또 보겠네~..”

“그렇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 꼬리에 남은 사소한 생채기를 보며, 꼭 갓 다시 눈을 떴을 때처럼 웃음이 터졌다. 따지자면 세 번째 삶으로 셈할 수 있을 것은 이전의 어떤 것보다도 만족스러웠다. 어디서도 겪지 못할 화려한 죽음, 부활, 뱀은 땅에서 기어 나와 제 몸을 먹어 삼켰다. 그리고, 그리고. 웃음이 잦아드는 어깨가 떨렸다. 몸을 비스듬히 가로지른 낙뢰의 흔적을 따라 열기가 흘렀다가 이내 사라졌다. 돌아서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지던 것이 지나치게 명확하게 기억났다. 바람. 끌어올려 진 입가에서 쉬익, 소리가 샜다. 여전히 탄 내가 코끝을 맴돌았다. 대체할 수 없는 사냥감의 냄새. 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닿았다. 시야에 존재하지 않아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걸린 시간이 길기도 했다. 허리께가 저릿했다.


 

 더없이 굵직한 일이 지났으니 당분간은 한가로움 뿐이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둔 사지로 하릴없이 멀쩡한 시간을 흘렸다. 몸이 멈추니 머릿속이 바삐 돌아갔다. 곧잘 튀는 주의에 떠밀려 잊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혹여나, 싶어 확신 없는 마음으로 집을 박차고 떠나 다른 폭죽을 잡았다. 살갗 위로 온기가 남은 타인의 피가 젖어드는 감각이 좋았다. 눈을 깜박였다. 아니나다를까 낙뢰의 흔적은 덮이지 않았다. 뭉뚱그린 답은 인식도 하지 못한 채 어렵지 않게 쥐었다. 구체적인 모양새는 알 수 없었다. 피 냄새가 남은 채 초조한 걸음으로 집 안을 빙빙 도는 통에 기어이 꼬리에 맞아 떨어진 라디오가 산산이 조각났다. 파편을 아무렇게나 발로 밀어두었다. 꼭 잘못 박힌 가시라도 되는 양 거슬리는데, 거슬리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거슬린다고 표현할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다시 보면 알 수 있을까.



 

 얼마 전에 주워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너는 내게 꼭 찾아와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네가 아니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파노플리아에 고아원이라니. 급한 성미로는 당장에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밤이 깊었다. 그래서, 소파 등받이에 다리를 올리고 거꾸로 누웠던 뱀은 기어이 해가 뜨자마자 도로 소파를 넘어뜨리며 일어섰다. 저 집엔 나쁜 마녀가 살고 있대. 가까이 가면 잡아먹힐 거야. 읽은 적 없는 동화책의 한 구절을 입으로 아무렇게나 중얼거리며 찾아간 곳에는 숲 속의 마녀가 정말로 있었다. 잡혀 끌려간 귓바퀴가 얼얼한 것이 우스웠다. 꼭 죽인 적도 죽은 적도 없는 이들처럼 쓸모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요함도, 난폭한 자극도 없는 대화에는 지루함도 없었다. 가벼운 신경전이 있었던가? 아니, 아니지. 신경전과는 조금 다른데. 사냥감의 주위를 돌았다. 꼭, 다시 한 번 제 손으로 죽이고 싶다고 진작부터 생각했다. 주위를 돌며 생각을 더듬었다. 그게 다여야 했는데. 머리를 누른 손에 곧이곧대로 움직임을 멈추며 네 얼굴을 빤히 보았다. 왜 지금 당장 죽이고 싶지 않은 거지?



 

그럼 언제?



 

 의아함이 밀려들었으나 복잡한 것은 영 마땅치 않으니 제 심중도 대강 헤아렸다. 뭘 하고 싶지? 갖고 싶었다. 그러니까, 갖고 싶어서 죽이고 싶었다는 말이었다. 길고 가는 숨이 샜다. 혹자는 뭐가 다른 것이냐고 묻겠지만, 거대한 차이가 있었다. 살 냄새를 맡고 젖어든 사이를 파고들 때 피부 아래 흐르는 것보다 네 표정에 더 관심이 있었다. 여즉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 좋아서 당장 멈추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갈라진 장기 사이를 헤집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살해가 오롯한 목적으로 남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네 끝까지 제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러나 죽은 이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고개를 돌렸을 때 자연스레 시선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만 미루었다. 끝은 언제든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오만과 함께 느릿한 걸음을 두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네가 쉬이 떠나지 않을 것임을 의식 밖에서 자연스레 믿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은 엉뚱하게 답지 않은 행위들만 잔뜩 했다. 자연스레 건네어진 열쇠와, 제게 꼭 맞춘 듯한 커다란 욕실의 집. 제집처럼 여기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레시피 따위를 들여다보며 요리를 하고, 나른하게 네 옆에서 잠을 잤다. 제 둥지를 허물지는 않았어도 대개 새집에 있었다. 햇빛이 드는 소파 위에 길게 누워 고른 숨소리를 내다가 깼을 때, 문득 길들여지는 기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상보다는 꽤 괜찮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옆에 두고자 하는 서로의 목적이 일치하는 셈이니 이해관계라고 볼 수도 있었다. 

 

 늘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만큼이나 둘이 있는 것도 익숙했다. 살해를 속삭인 주제에 네 옆에서는 누구의 옆보다 태평한 잠을 잤다. 살해를 예고 받은 이 역시 그랬다. 잠결에 체온이 맞닿았다. 틈새에 결코 누군가 끼어들 수는 없을 듯이. 네 손에 목줄을 쥐어주는 시늉을 했다. 언제든 끊을 수 있는 목줄 정도야, 뭐.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또아리 튼 뱀의 몸 아래 체온이 낮은 몸이 감겼다. 더 이상 조여드는 대신 매끄러운 동작이 네 손 아래 고개를 디밀었다. 체온이 낮은 손이 뱀의 목을 쥐는 시늉을 했다. 피하지 않았고, 만족스러웠다. 객관적으로 제법 변칙적인 삶을 살았으나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엄연히 존재했기에,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안일하게 덮어두었다. 



 

- 어쩌면 해독제를 만들어 볼 수도 있겠어요.


 

 

 스스로의 안일함을 깨닫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에는 아주 명확한 약점이 있다. 일단 만들어져 손에 넣는다면 잇새에도 지닐 수 있는 것. 문고리를 막 잡아 돌리려던 손이 멈추었다. 가벼운 발걸음은 소리를 남기지 않았다. 비늘이 땅에 스치는 소리가 나직하게 흘렀다. 잰걸음은 인적이 없는 곳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해독제 조금으로 제가 쏟아붓는 죽음을 전부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네가, 내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꺼내놓은 말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사소한 사고들, 예를 들면 음식 따위에 옅은 독이 섞여드는 소소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함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거지?

 

 

 불순물을 난자하는 손끝마다 지루함이 달렸다. 날카로운 손끝으로 후벼낸 눈알을 쥔 아귀에 힘을 주었다. 뭉그러져 흐르는 것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다가 바닥을 기어간 흔적을 따라 발을 옮겼다. 손바닥에 온통 질척이는 것들이 엉망이 된 머리채에 옮겨 묻었다. 꺼져가는 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경련에 가까운 잔 떨림이 남은 손을 붙들고 느린 칼질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세상엔 끼어들어도 되는 일이 있고 아닌 게 있는 거야~!.. 그렇지-?”

 

 생각 이전에 내뱉어진 질문에는 답 대신 숨이 깍깍 넘어가는 소리가 돌아왔고, 기어이 몸에서 떼어냈을 무렵에는 그조차도 남지 않았다. 딱히 답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손을 한 번 허공에 던졌다가 받고 몸을 일으켰다. 걸음걸이는 무겁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볍다고 표현할 법한 것도 아니었다.


 

 돌아온 익숙한 정원, 익숙하게 문이 열리는 감각. 불이 꺼진 저택은 적막했다. 자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작은 소리도 한껏 퍼뜨리는 밤의 고요 속을 적어도 몸뚱이는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기척을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바람이 흘렀다. 창가에서 새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이 암흑을 방해했다. 걸음은 네게 닿기 전에 멈추었다. 흐름 없는 공기에서 숨을 들이켜자 피비린내가 조금 났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응?”

 

 입꼬리가 버릇처럼 올라갔다가, 녹아 흘러 다시 내려오자 퍽 무감정한 얼굴이 되었다. 

 

 “응?”

 “기분이 상한 모양인데.”

 

 바닥에서 낮게 띄워진 꼬리가 느리게 허공을 긁었다. 분명하게 마주한 시선 사이에 들어찬 침묵을 깨듯 던져진 손이 미세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무의미하게 옮겨가는 눈길을 내내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이쪽도 죽이고 싶어졌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커졌다. 그리 길지 않은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죽이고 싶었던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닌데, 뭔가 달라. 입에서 새는 소리만큼이나 규칙적인 발걸음이 느리게 다가왔다. 네게 화가 났다. 불순물을 끼워 넣은 것에. 비스듬하게 선 채 다가오는 모양새를 보았다.

 

 불시에 움직인 몸 뒤로 꼬리가 사냥과 별다른 차이 없이 허공에서 휘둘러졌다. 밀어붙여 누른 몸을 넘어 네 등이 벽에 부딪힌 감각이 밀어붙인 손에 둔하게 닿았다. 네 얼굴 바로 옆에 세차게 들이박힌 날 끝이 벽을 파고든 것이 시야 가장자리에 흐릿하게 걸쳤다. 어두운 눈동자에는 표정이 사라진 제 얼굴이 비치지 않았지만 저만큼이나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알았다. 가까워진 얼굴 사이로 숨이 오갔다. 짓눌린 이가 손을 드는가 싶더니 미지근한 온기가 눈가에 닿았다. 

 

 죽이고 싶은데, 죽이고 싶지 않아. 영문 모를 상충이 의식 뒤로 제쳐놓았던 혼란을 표면으로 끌어올렸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 갖고 싶다.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감정인데. 아니, 달랐다. “쓸데없는 거, 끼워 넣지 마.” 어조의 고저가 사라진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네게 뱉어두고 지워진 표정에 다른 것이 떠오르기 전에 몸을 돌렸다.

 

 발밑에 복도 대신 풀이 스치는 데에 걸린 시간은 순식간이었다. 상비약을 찾듯 휴대폰을 뒤졌다. 습격 임무는 다행히도 흔해빠진 일이었다. 반갑게 달려간 곳에서 익숙하게 마주한 공포에 떠는 얼굴이나 뭉그러지는 살점 따위의 것들은 불유쾌함을 걷어내는 것에 꽤 도움이 되었다. 비명을 질러대는 것의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떼어내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에 잠시 멈추었다. “이거 몇 캐럿이야-?” 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튀어 오른 핏방울이 되려 번질 것을 알면서도 손등으로 얼굴을 아무렇게나 닦았다. 혼란은 이내 다시 의식 아래로 가라앉았다. 곧 비명이 멎은 방 안에서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쥐고 나온 다이아몬드 반지를 정원에서 달빛에 이리저리 비추어보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풀숲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떼는 걸음이 경쾌할 만치 가벼웠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오랜만에 제 보금자리에서 잠을 청하고 나서는 완전히 괜찮아졌다고 여겼다.



 

-



 

 시야 밖에 오랜 시간 떼어두고 싶지 않았으니 뱀은 곧 제 자리로 돌아갔다. 노트북의 자판을 두들기는 불규칙적인 소리는 잠이 잘 오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소파 위에서 다시 잠들기 직전에 평온하게 생각했다. 근처를 오가는 기척에 설핏 잠이 깨었으나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다. 난데없이 입술이 겹쳐오기 전까지는 늘 그랬듯이 무시하고 잘 예정이었다. 

 

 “ㅡ!”

 

 놀라 요란하게 파득인 팔에 네 무게가 밀려났다. 날 끝에 무언가 스치는 감각이 있었다. 당황한 시야에 그리 얕지 않게 베인 상처가 들어왔다. 꼭 목줄같네. 채 놀람이 가라앉지 않았음에도 잠시 엉뚱한 생각이 스치는 사이 피가 배는 목이 네 손에 가려졌다.

 

 “먹겠다는 건데, 믿지 못한 건 아니니까.”

 “방금 그건 진짜 죽는다고~~...”

 

 여전히 귀에 제 심장소리가 들리다가 잦아들었다. “한 방 먹은 것 같아서 짜증나네~..” 밀어내기 위해 벌떡 일으켰던 몸을 다시 쿠션에 기대 묻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네 손가락 끝이 상처에 파고드는 모양을 보았다. 사실상 딱히 짜증이라고 할만한 감정은 아니었다. 시선은 네가 자리를 옮겨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 것까지 떨어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다친 건 난데 왜 네가 골이 난 건지 모르겠군.”

 “누님이 언제부터 그런 걸로 다친 시늉을 했담-?”

 

 등받이에 걸쳐져 바닥에 늘어진 꼬리 끝을 어림없는 소리, 하고 말하듯이 휙 흔들고는 난리통에 흐트러진 쿠션이 영 불편해 다시 등을 든 채 이리저리 자세를 고쳤다. 간신히 마음에 드는 자세를 찾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이젠 정말 무슨 말을 하든 못들은 체 할 예정이었다. 들락날락하던 혼란이 이번엔 나름대로 잔잔하고 온건한 형태로 기어올랐다.

 

 동요 없는 숨소리와 감은 눈 아래서 결혼반지를 떠올렸다. 소유의 표식, 손가락에 채워둔 목줄이나 다름없었다. 모두에게 자신의 것임을 알리고, 모르는 이가 보아도 알 수 있는 표식을 남기는 행위였다. 결론은, 겉포장의 낭만 따위를 벗겨내면 결국 죄다 같은 감정이다. 변하지 않는 소유를 약속한다. 시선을 고정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 얽히고 조여들고 집어삼켜서. 

 

 다들 통째로 갖고 싶은 거잖아.

 

 눈알뿐만이 아니라, 시선이. 파헤쳐진 흉곽 속의 심장뿐만이 아니라, 온기가 도는 피부에 얼굴을 묻었을 때 뛰고 있는 것이. 잘려나간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제 몸을 덧그리는 손길이. 열 오른 숨소리가. 미세한 표정의 변화가. 잠에 든 얼굴이. 기대어오는 무게가. 속삭이는, 잠긴, 평온한, 목소리가.

 

종막에는 닫히지 않은 네 마지막 눈이 보고 있는 광경이.


 

그 무엇도 놓치지 않고, 아주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나와 이어진 삶부터 종막까지, 방해 없이.

네 모든 것을 온전하게 전부 갖고 싶다는 건.


 

  역시 내가 누님을 ‘사랑’한다는 소리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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