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LUTO
고즈넉한 방 안에는 빠르게 울리는 정갈한 키보드 타자음과 바람이 좁은 틈을 비집고 흘러나오듯 뱉어지는 일정한 숨소리만이 울렸다. 따사로운 빛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울고 색이 변함에 따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소리가 하나 멎었다. 탁, 마침표를 찍어내리고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들린다. 굳은 몸이 펴지고 고개의 움직임에 따라 아래로 쏠려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제자리로 향한다. 마른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여전히 빛이 들지 않는 눈이 긴 소파 위를 차지하고 누운 초록색 인영을 본다.
피유욱. 익숙한 숨소리를 듣는다. 시선은 가슴팍이 일정하게 오르락거리며 소리를 내는 유일한 대상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화면을 닫았다. 그대로 의자에 등을 기대지도 그렇다고 일어서지도 않은 채 언제나처럼 머물렀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계기 또한 마찬가지였으므로, 이유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주변의 모든 것을 눈에 쉽게 담았고 쉽게 흘려냈다. 그러니 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고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기억나는 것이라곤 마음에 들어 담아둔 것과 마음에 들지 않아 거슬리는 것뿐. 풍경은 얼추 기억났고, 몇 가지 장면이 스치웠고.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앉아 꼬리를 살랑이고 기웃거리고 또아리를 틀 듯 빙글빙글 주변을 맴도는 네가 있었다. 왜, 뒷목을 내리누르듯 매만졌다.
시기도, 계기도, 의미도. 답을 대신하여 내려줄 사람은 없다.
정육면체의 구조를 가진 출입구 없는 회색 세계에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때때로 작은 물건이 놓였다가 사라지기는 했으나 오랜 시간 머무는 것은 없었다. 그런 곳에 초록색 뱀이 하나 생겼다. 작은 뱀은 처음에는 장난감처럼 미동이 없었다. 그저 한켠을 차지하고 누워있었다. 지금처럼.
느리게 눈꺼풀이 아래로 닫혔다가 다시 열리기를 반복한다. 세상에 무관심한 만큼 자신에게도 무관심하였으나 객관적인 평에 기반한 나를 안다. 호의를 품든 악의를 품든 관심 없었다. 그것으로 인해 득을 보든 피해를 받든 그 이후에 생각할 문제였다. 적당한 답례를 건네고, 피해는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엔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무의미하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삶의 대부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것들은 그곳에 존재했고, 그도 이곳에 존재했을 뿐이다.
그 어떤 것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관심도 주지 않고, 의미를 주지 않은 채로. 애써서 자신을 바꾸려는 시도를 막은 것은 아니었다. 시도를 내버려 두되 결과를 허용하지 않았을 뿐. 거절당하고 거부당한 타인의 반응은 어느 정도 기억한다. 대부분 비슷했으므로 뚜렷하지 않은 얼굴의 윤곽을 그려내듯 그 정도의 기억이었다. 타인은 이목구비가 존재하지 않은 마네킹과 비슷했다. 되새기고, 되새겨야만 기억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 지루하였고 그 또한 타인에게서 의미 없는 대상이었다. 손에 쥐고자 하는 것이 없어 이룩한 모든 것을 남에게 건네고 기회가 닿으면 홀연히 사라질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런 세상, 살아있기에 살아가는 관성적인 그는 그것이 편했다.
눈앞의 대상도 같았다. 서로의 죽음을 논하며 그 가볍디가벼웠던 지긋한 시간을 환기하는 정도의 바람이었다. 기억이 돌아오면 서로의 목숨을 노려야 하는 그런 흔한 타인이었다. 지난한 세월 동안 그의 죽음을 기원하고, 저주하여, 바라는 이는 많았으므로. 톡, 단단한 노트북 위를 한번 오갔다. 그러했던 대상은 틀어진 일처럼 다르게 변모했다. 저택 바깥에만 나가면 널린 초록과는 다른 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바닥에 닿는다. 늘어져 닿은 것을 보며 의문을 나열했다. 알고 있다. 시선이 계속 가닿아 관심을 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쉬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이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라며 얄밉게 웃는다. 답을 내려줄 사람이 없다는 것마저 알았고, 시간이 지나면 이대로 묻어버릴 것을 알았다. 알아야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목소리는 커진다.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깊어져서 음울히 내려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자 했다. 여태까지의 삶 속에서 없었던 것이었으므로.
네가 내게 무슨 의미인지,
나는 네게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이 거리감을 무엇이라 정의 내려야 하는지.
의미의 대상조차도 답을 내려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퍽 투쟁 같았고, 발악 같아서. 평온한 시간을 취하려는 것처럼 등받이에 기댔다. 평생의 내가 아닌 그곳에서부터의 나를 알면 되는 일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긴 시간을 투자하게 할 것이고, 이미 소모하고 있었으므로. 기억 속 시곗바늘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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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 곤두세워진 분위기,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그곳에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어그러진 곳에서 혼재한 기억을 더듬어 서로를 탐색하던 그 장소가 기억하는 처음이었다. 죽음을 입에 담았다. 뜻이 다르고, 존재가 달라지면 죽이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어떤 대화를 지속하던 너는 웃었고, 나는 웃지 않았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가늘고 길게, 곁에 있는 동안은 끊이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이 거슬리지 않았다.
천진난만하여 순수하고 곧은 흥미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들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재미라고는 느낄 수 없는, 그 성가신 행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는 명백하게 즐거워하고 있었으므로. 그 행위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의 존재가 이해가지 않는다. 가벼이 주먹을 쥐었다가 편다. 힘이 들어가지도, 무언가를 쥐지도 않은 손을 본다. 폭력은 유용한 수단일 뿐, 즐거움, 해방감. 그 어떠한 것도 주지 않았다. 널브러지듯 놓여있는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생각도 없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시선을 들어 올린다. 잠든 너는 움직이지 않지만, 세세한 버릇까지 익힌 검은 눈은 익숙한 행동을 그릴 수 있었다. 기웃거리는 고갯짓, 먹잇감을 발견한 듯 핥아내리는 혀, 금방이라도 붙들고 싶은 듯 주변을 오가는. 익숙하지 않은 동물에게 관심이 갔을지도 모른다. 키워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스쳤던 것을 인지하고 있음으로. 그리하여 마녀는 뱀에게 ‘토끼’를 요구하였다.
평생 아이로 볼 일 없을 거라 단언했다. 이미 다 자란 네게는 붙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을 아이라고 부르기엔 적절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잠시나마 아이로 보았던 때가 있다. 지루한 것, 그리 달갑지 않은 것에 대하여 웃음기 걷힌 표정에, 무슨 생각을 했었나. 궁금했다. 왜, 달라졌는지. 그래서 물었다. 이미 지나간 것은 손댈 수 없기에 과거에 관심이 없으면서. 그 이유가 궁금하여 물었다. 그리 원치 않은 티를 내면서도 열린 입의 설명대로, 아이를 그려나갔다. 제 마음대로. 큰 의미는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야 했기에 물었고 답을 들었을 뿐이다. 아이가 좋아서,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아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으므로. 이기적인 행위가 습관적으로 펼쳐진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눈을 내리감았다. 세상은 쉽게 어두워지고 고요해진다. 숨소리가 들린다. 방 안에 놓인 뱀처럼 자신의 존재를, 의미를 알아차리라는 것처럼. 정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선택처럼, 이것에 대한 정의는 자신이 내린 것이 답이 될 것이다. 이해하기 위한 첫 시도였다고, 그는 하나의 행위에 대한 답을 내렸다.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리했다.
그 이후부터, 잔잔한 수면 같았던 사고에 많은 것이 끼어들었다. 비슷한 것을 떠올려 덧대어보고, 들은 말에 감상이 떠오르고, 더 궁금해졌다. 손에 묻은 것을 삼켜보고 싶다고. 지루하게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신뢰가 쌓여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새 눈은 다시 소파에 누운 것을 본다. 입에 가닿은 시선은 곧 화들짝 놀라 도망치는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죽이고자 하나 죽이지는 않는. 그것의 연장선인가. 목을 가벼이 짓누르듯 만졌다. 죽음의 감각을 헤아리는 것처럼. 참으로, 많이도. 관심을 주어서. 실소가 비집고 나와도 할 말이 없단 생각을 했다.
너에게 죽었다.
성가시고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정해져 있는 일이었다. 감흥은 없었다. 죽음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므로. 막연한 감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이곳의 하늘이 마음에 들었던가. 진흙탕 싸움이다. 칼을 겨눠야 할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하여, 이정표를 외면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원망하지 않는다. 비통하지도, 원한을 사지도 않는다. 알고 있다. 단조로운 투로 말을 뱉으며 묵묵히 벼락을 끌어다 휘두른다. 이미 피비린내가 가득하였고, 탄 내가 진동했다. 시야는 흐려져 상대의 윤곽조차도 뿌옇게 제대로 된 선을 찾지 못하였으나 그것조차도 개의치 않고 내지른다. 얼룩진 고통과 뿌연 시야에 찌푸려진 눈은 곧 토해낸 붉은 것을 보았고, 깨달았다. 죽음은 생각보다 계획적이라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키듯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초록빛이었고,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보지 못하였으므로. 조용하고 긴 숨을 내뱉었다. 생이 다시 찾아왔다.
시간을 되감고 그것을 다시 돌리고, 곳곳에 쌓인 인식에 대하여 어느 것이 시작이었는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 뿐. 태평하게 자는 모습을 본다. 그때와는 다른 얼굴이다. 미련하나 없이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빈 껍데기로 놓여 있던 것과는 다른 얼굴. 고개가 기울어진다. 화가 났었나. 가끔 꿈이라도 꾸는 건지 살랑이는 꼬리를 본다. 해야 할 것이 있기에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서, 꼬리를 짓밟았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것이었으니 분풀이에 가까운 형태였다. 시간이 흘러 의미는 퇴색될 것이고, 찾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화가 났다.
노트북을 들어 테이블에 옮겨둔다. 팔걸이를 짚고 일어서서 몇 걸음 내디딘다. 인기척에 숨소리가 멎는다. 감은 눈은 떠지지 않는다. 코앞까지 다가가 조용히 주시하다가 이내 바닥에 주저앉는다. 한쪽 무릎을 세워 그것을 끌어안듯 앉아서 잠든 너와 시선을 맞춘다. 그때도 이러했다. 시선을 맞추려 한 것은 반대였지만, 비슷한 상황이었다. 흙바닥에 주저앉자 시선을 맞추듯 꼬리에서 땅으로 내려온 모습이, 기억났다. 그것이 새삼스러웠다고, 자신의 감정을 기억한다.
그때, 처음으로 네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대화하기 위해 맞춰야 하는 의무적인 시선도 아니고 미련 없이 오가는 시늉도 아닌. 작은 아이로부터 시작된 것이 지금의 네게로 향했다. 분명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얼굴은 희미한 기억 속과 유사했으나 달랐다. 손을 뻗어 네 뺨에 가져다 댄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손끝이 맹인의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온기 위를 누볐다. 형태를 잡아가던 너를 제대로 인식한 것이 그때였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누군가 물건을 쌓아두든, 그곳을 출입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라, 방의 주인이 허용하지 않고서는 남을 수 없었다. 너를 그때 허락했다고, 인식의 첫 순간을 기억해내었다고 알리는 것처럼. 그것이 시작이었음을. “더 자라.” 아직은 눈을 뜨지 말라고, 손길을 거두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 전혀 다른 외모, 무엇 하나 같아 보이지 않는 겉모습과 반대로 거울에 비치는 상처럼 닮았다. 거울 위 형상은 하나는 웃고, 하나는 웃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온도는 비슷했다. 어느 곳에 위치하였는지만 다를 뿐,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미지근하여 담고 있는지 모를 정도의 온도. 때때로 하나는 위로 치솟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 떨어졌으니 아마도 비슷했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독이 묻었다. 네가 궁금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래, 네가 궁금하다고. 내 입으로 이야기했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진실을 숨기고자 한다면 일부만 이야기하고 만다. 그러니 그는 거짓을 논하지 않고 진심을 쉬이 뱉었다. 궁금하였으니 궁금하다고 말했다. 알고 싶으니 알고 싶다고 말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여 이리도 공들여 고심하여 고찰한다. 많은 것을 허용하고 시선으로 널 쫓는다. 너는 내게 무엇이냐고. 왜 이리도 홀로 특별하여 존재를 드러내는지. 억지로 끌어다 두던 의미가 사라진 자리를 제멋대로 비집고 들어와 무엇을 바라느냐고. 난해하다. 처음이란 것은 본래 낯설고 어려울 수 있으나 이것은 그러한 일과는 달랐다. 의미와 거리가 특별함으로 정의내려진다면, 왜. 너는 나에게 특별한가. 고개를 숙여 가까이한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은 여전히 숨소리가 나지 않는다. 살랑이던 꼬리 짓도 멈췄다. 눈을 뜨지 말라 한 것을 알아들어 눈은 곱게 감겨 있다. 뱀은 길들일 수 없다고, 그 말이 떠올라 그때와 같이 비식거리는 메마른 숨을 뱉었다.
가까워진 얼굴은 익숙하다. 누군가의 얼굴이, 거리감이. 이리도 익숙할 수 있던가. 코끝이 스치듯 부딪친다. 의미의 지속성. 명료하게 정의내려지지 않은 것이 답답하여서 답을 구한다. 삭막한 세계 안에서 초록색 뱀은 제집인 것처럼 돌아다닌다. 이곳이 자신의 것이라고 알리는 움직임이 죽음까지도 흥미를 보이는 회보랏빛 눈에 비치는 소유욕을 닮았다. 눈을 감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의미라 이름 붙이고 이토록 많은 것을 허용해줄 정도로 자신이 관대하였는가. 단순히 이것이 유의미하기에 시선을 주고 관심을 주었는가.
견딜 수 있는 모든 의미에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의미, 거리감, 특별함, 관계, 감정.
살면서 이런 식으로 찾아온 것은 이 지난한 평생 이 한 번뿐이었다. 가족에게서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친구란 존재에 얽매이지도 않으니, 보호해야 할 것에 깊은 정을 주지 못한다. 아이도 아닌, 친구도 아닌, 가족도 아닌. 공적인 관계로도 묶이지 않는 너는 나에게 무엇인가. 관계를 하나씩 제외한다. 감정을 제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으므로. 그렇게 하나씩 떨어지고, 떨어져 남은 것은.
인류는 태초부터 이 감정에 대한 많은 고찰을 해왔다. 이것은 단순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형태를 가지지 못한 것이라서. 누군가는 이것을 가장 좋은 것만을 내어주고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고자 하였고, 누군가는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갖고자 하였다. 모든 사람의 형태가 달랐고, 그리하여 일반화된 것만이 가장 건강한 형태로 굳어져 남았다. 주변에서 흔하디흔하게 듣고, 흔하디흔하게 접하고, 흔하디흔하게 정답으로 받아들이며. 이 불가항력의 무언가는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처럼 정의할 수 없는 것의 답으로 존재하였다.
--하기에 포기하였고, --하기에 포기할 수 없다.
사랑하기에 허용하였고, 사랑하기에 허용할 수 없다.
--하기에 슬퍼하였고, --하기에 기뻐하였다.
사랑하기에 슬퍼하였고, 사랑하기에 기뻐하였다.
--하기에 죽였다고, --하기에.
사랑하기에 죽였다고, 사랑하기에.
“사마엘.”
나직하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고요하다. 아마 그 입에서는 죽음과 사랑이 같은 깊이와 같은 어감으로 흘러나올 터였다. 여전히 시선은 네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답을 구할 수 없을 때, 그것의 답이 무엇으로 결론 나는지. 알고 있기에 단조로이 흘러나온 것은 이것뿐이다. 내어놓은 정의에 의미가 명료해짐에 따라 그것을 해답이었노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틀에 맞추어 이것을 고한다면, 유일을 정의하고.
나의 틀에서 너를 부른다면.
숨이 맞닿는 거리에서 코끝을 비스듬히 스치워 고개를 더 숙였다. 말캉한 살이 닿으며, 움직이려는 몸을 제지하듯 가벼이 짓누른다. 검은 눈은 어느새 뜨여 있었고, 입술 끝이 스쳤다. 평온하고, 고요하게, 망설임 하나 없이. 사랑을 고했다. 의미가 유로 존재하는 동안, 네게 죽음까지도 허락하겠다고.